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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by 연강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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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책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없고,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이 대부분)

제목부터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된 후 대중들에게 한 말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말했다.(알쓸신잡1 2화 中)

고등학생일 때 김영하 작가 소설 시리즈를 샀었는데, 그 당시엔 읽지 않았었다. 그래도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보며 짧게, 짧게나마 생각하곤 했다. 과연, 내게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2021년이 다 가고 있는 12월 나는 이 책을 집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이었던 그 당시에는 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책을 집어들만큼 나를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는 게. 지금 이 책이 내게 온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며, 나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찾았다.

고백하건데, 2021년의 내게 꽤 힘든 시간이었다. 나아가야함에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멈춰있는 내가 싫어서 나를 많이도 미워했다. 이유 모를 분노 또한 내게 생겨났다. 그 분노에는 향하는 사람이 없어 그게 나에게로 향했다. 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생각했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지? 죽음은 무엇이지? 때때로 행복을 느꼈지만,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빈도를 우울이 덮쳐버린 것만은 분명했다. (걱정마시라. 지금은 괜찮다.) 작가는 한 팟캐스트에서 집에 틀어박혀서 백수일 시절에 어떠한 격렬함을 가지고 15일 만에 썼다고 말했다.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 Episode 5) 이런 책을 썼다는 것 자체가 한 동안 그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점에서 괜스레 위로가 되기도 했다. 짧은 글이었지만 그 안에 생각들이 내가 했던 생각들과 비슷했다고 느꼈다.

책 자체에서 받은 느낌은, 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약간 눈살 찌뿌려지긴 하는데, 책 자체는 정말 스타일리시했다. 그림과 함께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것도 좋았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1>,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 책에서는 이름 없는 누군가가 자살안내인을 하며 자살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살을 돕는 역할을 한다.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일이 끝나면 여행을 간다. 그 이름 없는 누군가가 자신의 고객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p134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 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 없이 무료하다. … (중략) …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나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서 답을 얻었다. 지금도 그렇고 먼 미래에도 자살 안내인이 내게 찾아온다면 그를 따라가지는 않겠노라고. 나 스스로 나를 파괴할 자신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뒤돌아보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것이라고. 설령 그 길이 고통스럽고, 지금처럼 무료하더라도 말이다.

정작 이름 모를 자살 안내인이 원하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남의 인생을 마지막을 돕는 것이 아닌 자기 인생의 종말이 그가 원했던 것일까.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있을까. 그의 파괴는 어떤 형식일까. 친구는 파괴는 믿는 것이라고 언젠가 내게 말했다. 지금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아무튼, 유디트, 미미 그들의 파괴는 죽음이었지만, 다른 이들의 파괴, 나의 파괴는 어떠한 것일까. 파괴와 권리. 권리에는 항상 그 반대급부로 의무가 따른다. 그 의무란 무엇일까. 파괴의 반대는 보통 지키는 것인가. /






국어시간에 창작과제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구상했던 것은 ‘잠 못 드는 밤’이었다. 잠을 편히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밤에 공원 같은 곳에 나와서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으며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하자. 어떤 사람들이 연대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국 완성하지는 못 했었다. 그 이야기들을 생각하다가 이야기의 주인은 나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 마지막에 남은 한 사람의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 같다. 마지막에 다 잠든 곳에서 혼자 잠 못 자는 사람은 어떡하지 이런 생각? 지금 생각하니 웃기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니 그 때 완성하지 못했던 명확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인간이 누군가의 이야기에 어떤 의지가 없고서야 들어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이 책에서는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어 주겠다는 인물을 설정해서, 자살의 강한 동기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고 행할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만한 사람을 설정했던 것이다. 그런 이들은 자신을 알고 있는 이보다, 낯선 누군가에게 자기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으니 말이다. 그런 설정들이 필요했음을 이 책을 통해 뒤늦게 깨달았다.

 

 

책의 내용이 상당히 우울하다. 그 점 유의하시고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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